지명유래
작성일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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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동(園仁洞) | |
작성자 | 관리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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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치]
원인동은 시청에서 동쪽으로 약 3.3km 떨어져 있으며 동쪽으로는 원주천을 경계로 봉산동, 서쪽으로는 일산동, 남쪽으로는 명륜1동, 북쪽으로는 중앙동 및 학성동과 접해 있는 시내의 중심지역이다. [유래] '원동(園洞)'은 강원감영 앞의 남산을 원주의 정원으로 보아 남산정(南山町)의 이름을 고쳐 원동(園洞)이라 하였다. '인동(仁洞)'은 조선시대 때 원주목사 한준겸(韓浚謙)의 딸이 이곳에서 태어나 16대 인조(仁祖)의 비(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되었으므로 '인(仁)'자를 따서 '인동(仁洞)'이라 하였다. '원인동(圓仁洞)'은 1961년 원동과 인동을 병합하면서 각각 앞 글자를 따서 만든 이름이다. [연혁] 원동(園洞)과 인동(仁洞)은 원래 원주군(原州郡) 본부면(本部面) 상동리(上同里)에 속해 있었다. 1937년 원주군 본부면이 원주읍(原州邑)으로 승격하며 14개 정(町)으로 편성될 때 상동리는 본정일정목(本町一丁目)‧개운정(開運町)‧남산정(南山町)‧대화정(大和町)으로 나뉘어 편성되었는데 이때 원동은 남산정, 인동은 대화정 지역이었다. 1946년 정(町)을 동(洞)으로 변경하면서 남산정을 원동으로, 대화정을 인동으로 각각 이름을 바꾸었다. 1955년 원주읍이 원주시(原州市)로 승격하면서 원주시 원동‧인동이 되었다. 1961년 연합 동제(洞制) 실시에 따라 원동·인동을 원인동으로 하였다. [지명] 다박골 [마을] [위치] 다박골에 있던 마을을 말한다. 현 다박골사거리를 중심으로 한 마을이다. '타박골', '저전동', '다복동', '박밭골', '탑앞골', '탑전동'이라고도 한다. [유래] 절에 탑이 있으므로 그 앞의 골짜기를 '탑앞골'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이 '탑앞골>타밥골>타박골>다박골'이 되었다. 이를 한자로 적어서 '탑전(塔前)' 또는 다박골을 닥밭골(닥나무밭)로 인식하여 '저전동(楮田洞)'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저전동면(楮田洞面)' 이 다박골에서 연유한 것이다. 동문거리(東門--) [마을] [위치] 동문 주변에 있던 마을을 말한다. 원주교오거리 서쪽, 쌍다리풍물시장 주변으로 추정된다. [유래] 조선시대 강원감영(江原監營)의 동문(東門)이 있던 길 주변으로 마을이 섰으므로 동문거리라 하였다. 상동리(上洞里) [마을] [위치] 1910년대 현 행정구역상의 원동, 인동, 개운동, 명륜동 지역을 지칭하던 이름이다. [유래] 원래 본부면의 위쪽이므로 본부면 상동(上洞)이라 하였다. [내용]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본부면의 본읍리(本邑里)와 삼리(三里), 부흥사면(富興寺面)의 일리(一里), 판제면(板梯面)의 하일리(下一里) 각 일부를 병합하여 상동리(上東里)라 하였다. 1937년에 본부면이 원주읍으로 승격함에 따라 개운정(開運町), 남산정(南山町), 대화정(大和町), 본정일정목(本町一丁目)으로 나누고, 상동리 일부와 하동리 일부를 본정이정목(本町二丁目), 금정(錦町)으로 나누었다가 1946년에 동명 변경에 의해 남산정을 원동으로, 대화정을 인동으로, 본정이정목을 중앙동으로, 금정을 일산동으로 고치고, 개운정은 개운동으로 하였다. 서낭당고개 [고개] [위치] 원동에서 무실동으로 넘어가던 고개를 말한다. 청산사거리에서 정골을 지나 둣내, 신촌을 거쳐 무리실로 가던 고갯길로, 현 청산사거리에서 원주시청소년수련관 남쪽을 지나 평원중학교, 원주우편집중국으로 가던 고갯길이다. [유래] 고개에 서낭당이 있었다고 한다. 인동(仁洞) [마을] [위치] 원주교오거리와 인동사거리, 남부시장을 잇는 삼각형 모양의 작은 마을이다. 마을 안에 가톨릭센터와 성지병원이 있다. [유래] 조선 16대 인조(仁祖)의 비(妃) 인열왕후(仁烈王后)가 태어난 곳이므로 인동(仁洞)이라 하였다. 원래 원주군 본부면(本部面) 상동리(上洞里)의 지역인데, 1937년 원주읍제 실시에 따라 대화정(大和町)이라 하다가 1946년 인동으로 고쳤다. 추월대(秋月臺) [유적] [위치] 남산 봉우리 북동쪽, 능선 끝에 있던 대(臺)를 말한다. 현 KBS원주방송국 남쪽 언덕에 기념비를 세웠다. [유래] 〚여지도서〛에 고을 뒤쪽 산기슭에 예전에 섬돌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고 하였다. 인조 때의 강원도관찰사였던 이민구(李敏求)가 이곳에 올라 치악산에 뜬 가을 달을 보고 그 경관이 좋아서 '추월대'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시가 한 수 전하고 있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여기가 빈 동산이었는데 지금은 주택이 들어섰다. 1995년 원주시와 원주문화원에서 터를 확보하여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이민구의 「등추월대(登秋月臺」 시가 새겨져 있다. 호주말 [마을] [위치] 옛 소방서 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지금의 강원감영 남쪽 지역을 말한다. [내용] 옛날에 백정들이 집단으로 모여 산 곳이라고 한다 |